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탄불 더비 (문단 편집) == 유래 == [[1905년]]에 창단된 갈라타사라이와 [[1907년]]에 창단된 페네르바흐체는 서로 창단 멤버들이 판이하게 달랐다. 갈라타사라이는 주로 [[오스만 제국]] [[귀족]]들로 이뤄졌던 반면에 페네르바흐체는 사병 및 하급 장교들로 이뤄진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됐다.[* 참고로 [[베식타스 JK]]는 [[노동자]]들 위주로 창단됐다.] 그러다 보니 초창기엔 갈라타사라이가 재정이나 여러 요소에서 앞서면서 페네르바흐체를 압도했다. 일단 공식적인 첫 경기는 1909년 1월 17일 친선 경기였는데 갈라타사라이가 2-0으로 이겼다. 그 뒤로도 갈라타사라이가 7전 전승에 무실점으로 압도하다가, 1914년 1월 4일 8번째 경기에서 페네르바흐체가 4-2로 처음으로 이겼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점수 차가 난 경기는 1911년 2월 12일 경기로 갈라타사라이가 7-0으로 이겼던 경기이며, 페네르바흐체는 2002년 6월 11일 리그 경기에서 6-0으로 이긴 게 가장 크게 이긴 경기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alatasaray-Fenerbah%C3%A7e_1913-14.jpg|width=100%]]}}} || || 1913~14 시즌 챔피언십에서 경기를 벌이기 전, 양 팀 선수들끼리 모여 찍은 사진. || 부유한 귀족 팀과 가난한 군인 팀의 격돌이다 보니 처음부터 감정이 쌓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실제로 초창기부터 계층 갈등이 격화된 사례로는 [[엘 수페르클라시코]]나 [[영원한 적들의 더비]] 등이 있다.] 오히려 이스탄불 리그 시절인 1950년대만 해도 서로 사이 좋게 응원하고 지면 승자에게 격려하는 응원을 보이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리그 1(뒤에 튀르키예 쉬페르리그로 개편)으로 자리를 잡고 차츰 서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TV]]란 매체의 등장과 같이 리그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경쟁을 언론과 기업들이 유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어찌 됐든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오며 팀 내 수익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쳤다. 다만, 더비 경기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이렇게 '[[의도는 좋았다]]'로 시작하긴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차이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나아가 서포터들 자존심 문제 및 온갖 갈등에 결정적으로 돈과 수입 문제가 개입되면서 결국에는 감정 싸움으로 변하며 라이벌전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맨체스터 더비]]도 처음에는 사이 좋게 웃으며 경기를 하던 관계였다. 세계 각지 스포츠 더비들 상당수가 비슷한 역사를 거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